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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에 균열을 내지만 그럼으로써 나의 작은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사람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의 모든 많은 부분이 인스타-여름-유럽-필카 감성의 구도 아래 놓여 있다고 생각했긴 하지만, 첫 두 편의 글을 읽으면서 평생 이방인으로써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고 어렴풋 느껴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덜컥 이국에서 삶을 마주한 사람들. 누군가는 평생 경험하지 못할 것들이라든지, 알지 않아도 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는 균열이 있다. 이방인. 소수자. 생김새. 그 이름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지금껏 살아버린 삶은 달랑거리는 가격표처럼 똑 떼어버릴 수 없으며 그런다고 완전해 지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 균열은 자꾸만 골이 깊어져만 가는 것 같은 날들이다.

 

그러나 ‘여름의 빌라'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맞닿을 때 더욱 선명해지는 균열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고, 이 소설들 역시 그런 믿음 속에서 썼을 것이다.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므로.” (‘작가의 말’)

 

첫 두 편의 글을 읽으며 공통적인 키워드로 균열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파괴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새롭게 창조할 수 없다 (여름의 빌라)’ 면 나의 작은 세계 또한 크고 작게 파괴되며 재건축되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자주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만 요즘 한국을 다시 벗어나니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나와 다른 삶을 살았는지 매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무나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피곤하며 많은 것을 배울까 기대되고 두려운 와중이기에 이 균열과 사랑, 이해와 세계의 확장에 대한 백수린 작가의 반복적인 주장이 인상 깊었다. 세계의 비슷하지 않은 부분들마저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그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 중 하나라고 난 믿는다. 백수린 작가의 글들 역시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을 단단히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모든 균열과 경계가 세계의 확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글 ‘여름의 빌라' 에서처럼 때로 나와 타인을 가르는 균열은 무심하고 깊게 존재해서 우리 세계의 융합이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확신이 되기도 한다. 때로 사람들은 그들의 경계를 지키고 싶어 하며 (고요한 사건), 혹은 이 경계를 공고히 하거나 상기시킴으로써 우리 세계의 확장을 막아낸다. (시간의 궤적) 나 또한 이런 균열의 끝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살아온 삶은 나의 세계의 일부이기에, 우리는 백수린이 말하는,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우리 사이 균열의 깊은 골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작가님의 다른 글들을 읽어본 건 아니지만 특히 이 소설집에서는 “신중하고, 조심하고, 몸을 사리는 (폭설)" 나와 다른, 그래서 매력적인 자극의 사람들이 ‘나'의 세계로 들어오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라는 황예인 평론가의 말에 동의한다. 세계의 균열과 확장이라는 테마 안에서 본다면 인물들의 소극성이 ‘나'라는 사람이 자신을 보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나'의 세계는 상대적으로 한없이 초라해 보이거나 여태 억눌려져 있었거나 혹은 무지했기에 작았지만, 그럼에도 ‘나' 들은 균열을 끌어안고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균열의 순간에는 도망치거나 실수했을지라도. 그런 점에서 백수린이 쓰는 사람들의 세계는 각자의 방식으로 확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을 꼽자면 ‘흑설탕 캔디.’ 해설을 읽고 난 뒤에는 표제작이기도 한 ‘여름의 빌라' 일 것 같다. 가볍게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도 좋았다. (전혀 다른 나와 너의 세계의 표면들이 잠시 맞닿는 거라면, 깊게 파괴되지 않고도 세계는 넓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산뜻하게.)

 

단편 소설집이란 나눠 읽으면 각 글의 디테일에 더 집중할 수 있고, 한 번에 읽으면 이렇게 책의 전체와 집필 기간 동안의 작가의 마음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잃어버리는 것들도 있겠지만. 봄방학 기념, 크레마 산 기념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빌려서 읽어보았는데 기대보다는 좋은 부분이 많았다. 여름이 들어가는 다른 현대문학 여성작가의 유명한 단편 소설집이라면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 생각나는데 참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들이라 재밌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여름은 장마와 끈적이는 습도가 특유의 산뜻함보다 앞선다고 느끼지만 근래에는 좀 더 싱그러운 해석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뭐든 여름이면 난 좋다.